회고 글을 작성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올해를 돌아보았는데, 작년은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쉽게 요약할 수 있었다면 올해는 굉장히 다차원적인 경험들을 한 덕분인가 쉽게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만큼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지만 배운 것도 참 많은 해였다.

 

1. 중요한 선택

올해 초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선택은 나의 일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올해 초에 다양한 이직 옵션들을 맞이할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좋은 선택지들이란걸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선택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나름대로의 원칙도 세워보고, 하나하나의 선택지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미래를 상상도 해보고, 주변의 조언도 구해보는 등 최대한 후회 없는 선택을 내리기 위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작년 말부터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여러 대표님들께 콜드콜이 오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크립토와 스타트업씬이 빠르게 성장하는걸 느끼면서 ‘아 잘하면 내년에 나에게 큰 기회가 올 수 있겠다’라는 느낌을 크게 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2022년에 대한 그림을 상상해보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그리던 그림들 중 가장 유력해보였던건 ‘빠르게 성장하는 크립토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벤처캐피탈리스트로서의 나의 모습은 작년만해도 상상하지 못하던 그림이었다. 그러던 중 작년 말에 우리 대표님께서 무려 나의 글을 읽어보시고 연락을 주셔서 만나뵙게 되었는데, 아직도 처음 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까지 해오신 투자건들과 왜 투자하였는지 이유를 한두문장으로 정리해서 이야기를 쭈욱 해주시는데 우와… 끝판왕 투자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날 적었던 메모를 다시보니 “내가 살면서 만나본 투자자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람.”이라고 적어놓았더라). 마지막까지 멋진 말들을 해주셨는데 ‘열심히 하는 것 보다 잘하는게 중요하다’와 ‘너에게 필요한건 경제적 자유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면 세상을 바라보는 뷰가 완전히 달라진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엔에 직관으로 먼저 선택지를 고른다음 후행적으로 근거를 끼워맞추는 케이스가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표님 처음 만난 날 너무 강한 느낌을 받은 나였기에 이미 나는 선택지가 정해졌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이 선택지가 왜 합리적인지 스스로 근거를 찾아 만드는 일을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중간중간에 ‘이 선택이 정말 맞을까?’라는 의심은 계속해서 있었다. 그래서 투자자로서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잘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그분과 같이 일했던 사람도 찾아가보고, 심지어는 반대 케이스인 ‘내가 VC를 지금 하면 안되는 이유’까지 고민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가장 강하게 끌렸던 것만은 분명했고, 고민하면 할수록 이 사람의 매력이 모든걸 뛰어넘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커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들도 많았다. 함께하게될 동료분에게도 엄청 배울 수 있을꺼라 확신했고, VC를 설립 단계부터 함께하는건 쉽게 경험해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에게 가장 큰 자유와 책임이 따르는 선택지였고, 그렇기에 큰 임팩트를 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3월 2일 앤파트너스 설립과 동시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보아도 이 선택은 가장 좋은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선택으로 인하여 예전에는 전혀 모르던 세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

 

2. 회사를 만들어가는 과정

회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한건 소중한 경험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서류 발급받으러 수시로 방문한 성동구청과 강남구청의 모습이다. 회사를 만들 때 서류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처음 알았다. 우리는 특히 창투사 라이센스를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서류들을 필요로한 것 같다. 회사 설립 과정과, 라이센스를 발급받는 과정을 경험해본건 분명 언젠가 도움이 될 것 같고, 창업가들이 얼마나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지도 체험해볼 수 있었다.

회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배운건 ‘LP의 존재’이다. 이전까지 나는 VC는 투자를 잘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그것 만큼이나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고, LP를 모시는 일이 핵심 중에서도 핵심임을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내 돈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 보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인데, 이는 펀드 비즈니스에서도 똑같았다. LP와 연을 맺는다는건 정해진 방법이 없는, 굉장히 예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해내는 대표님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올해 초만 하더라고 시장이 이렇게 박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막상 우리가 펀드를 조성할 때가 되니 시장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고 (마침 루나 사태와 겹쳤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담백하게(?) 회고가 가능하지만, 정말 그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펀드는 무사히 출범할 수 있었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 결성된 만큼 좋은 빈티지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또한 회사 설립과 함께한 덕분에 경험해볼 수 있었던건 회사의 색깔을 정의해가는 과정이었다. 사실 회사의 색깔은 우리 3명의 총 합으로 정의되긴 할텐데, 펀드 제안서를 작업하는 과정에서 문장으로도 정의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Entrepreneur behind Entrepreneur’. 항상 창업가 편에 서겠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투자에서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섞여있기 때문에 이 원칙을 지키는 투자사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올해 우리에게 발생한 케이스들에서 우리는 최대한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3. 스타트업에 투자한다는건

‘투자를 잘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 ‘대체 어떤 기준으로 투자할 스타트업을 선택해야 하는걸까?’ 라는 질문을 올해 내내 가지고 살았고, 당연히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고 정교화해 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은 이런 답변을 한다. ‘우선 말이 되는 아이템인지 판단하고(아이템), 얼마나 커질 수 있을지 생각해보며(시장), 만약 커질 수 있다고 하면 그걸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팀인지 본다(사람과 팀)’. 그런데 결국 최종 의사결정을 할때는 마지막 요소인 사람과 팀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템과 시장을 생각해보는건 경험과 공부를 통해 어느정도는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덕트를 직접 사용해보고, 지표를 보고, 고객을 만나며 아이템을 판단해볼 수 있으며, 해당 아이템이 atomic units에 해당하는지, 전반적인 발전 상황은 어떠한지, 경쟁사와 레퍼런스는 어디가 있고 지속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는지 등을 질문해보면 시장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파악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걸 잘하는건 또 다른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사람과 팀을 잘 보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정확히는 딱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끌리는 사람과 팀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게 어디서 발현된 것인지 딱 뭐라고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나름대로 ‘고민의 깊이가 깊은 사람’ ‘자신만의 뷰를 가진 사람’ ‘그래프의 기울기가 기본적으로 크고 + 가속도가 계속 증가하는 사람과 팀 (이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면 보인다)’ 정도로 표현하고는 있는데, 아직도 딱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사람을 잘 본다는건 어쩔 수 없이 직관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이 부분은 우선은 양을 늘린 다음 나만의 기준이 형성되면 그 기준의 퀄리티를 높여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있다. 그리고 이 기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지가 매우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관점으로 투자하는지는 ‘해치랩스 투자기‘에서 확인해보실 수 있다.

그렇게 올해 우리는 블라인드펀드에서 총 7개의 회사에 투자하게 되었다. 닥터나우, 해치랩스, 슬링(오르조), 잔디소프트(매드월드), 툰스퀘어, 뤼튼테크놀로지스, 모두의회계(머니핀)이 그 주인공이다. 위에서 회사의 색깔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 투자사 입장에서 포트폴리오 만큼 색깔을 드러내는건 없다고 생각한다. 투자할 당시에는 하나하나 의사결정하다보니 느끼지 못했는데, 포트폴리오들을 나열해놓고 보니 우리만의 색깔이 보이는 것 같다. 우선 빠르게 성장하는 섹터에 속하는 기업, 그중에서도 해당 섹터를 리드하고 있는(혹은 리드할 수 있는) 회사들을 매우 선호한다. 즉, 각 섹터에서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에 주로 투자한다. 다음으로는 비교적 젊은 창업가를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닥터나우 장지호, 뤼튼 이세영, 슬링 안강민, 해치랩스 문건기 대표는 순서대로 97,96,95,94년생이다. 젊다고 무조건 좋아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젊은 파운더들이 상대적으로 고정관념이 적어서 큰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있다 (솔직히 이건 내가 어린 점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업력을 가지고 있는 노련미 넘치는 창업가들도 너무 좋아한다. 

올해는 투자하는 것 만큼이나 투자하고 난 후가 재밌다는걸 깨달은 한해였기도 하다. 나는 투자한 회사들 방문해서 이야기 나누고 업데이트 주고받는게 너무 재밌는 것 같다. 성장해가는 회사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고, 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경영 현장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어떻게하면 더 회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도움을 주는 부분도 이 직업을 함에 있어서 아주 큰 보람이 되는 것 같다. 투자자가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1%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 상담, 의사결정 의견 교류, 인재 추천, 외부 시장환경 공유, 투자자 연결 등 VC로써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들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초보 VC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스킬이 항상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 내년에는 더 잘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내년에는 이 부분에 사용하는 절대적인 시간 자체를 늘리려고 한다.

 

4. 사람만나기

올해는 업이 업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당연히 좋은 회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내가 못해본 간접경험을 시켜줄 좋은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생각, 장기적으로 파트너십을 맺을 사람을 찾아야하는 생각 등이 결합되면서 우선 올해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리멤버에 따르면 작년보다 10배 많은 명함을 등록했더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보니 사람을 보는 나만의 기준이 작년에 비해서 정교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초를 떠올려보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고 일을 잘하는 사람인줄 알았지만, 지금와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물론 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올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없다는걸 떠올려보면 이런 소리 하는건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뛰어난 사람은 존재하는 것 같고, 나의 시간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늘리는게 장기적으로 아주 중요하다는걸 느끼는 중이다. 결국 나란 사람은 누구와 어울리는지가 많은 부분을 결정하는 것 같다.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얻은건 사람을 연결하는 재미이다. 사람을 만나게되면 주로 이 사람의 사고방식, 관심거리, 현재의 고민 등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어 이 사람이랑 연결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하는 느낌이 들때가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의 수 자체가 늘어나다보니 그런듯. 실제로 이들을 연결해주었을 때 반응들이 나쁘지 않았고 덩달아 나의 가치 또한 오르는 것 같아서 이건 앞으로도 나의 강점으로 잘 살려보려고 한다. 더 나아가서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은 어떤 일을 하면 잘할 것 같다 + 어느 회사랑 잘 맞을 것 같다’를 생각해보곤 하는데,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실제로 이 회사에 지원해보라고 추천하는 일이 몇번 있었고, 결과론적으로 나의 연결로 회사들에 들어간 사람들은 만족도들이 상당히 높은 것 같다. 올해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는데, 내년부터는 이런 능력을 잘 살려보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포트폴리오사들을 위해 많은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이 내년의 큰 목표 중 하나다.

그리고 올해는 특히 큰 성과를 이루신 대단하신 분들도 많이 접해본 한 해였던 것 같다. 커다란 결과물을 내셨음과 동시에 큰 부를 이루신 사람들의 대화를 옆에서 볼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세계들을 새롭게 알게되었음은 물론이고 이들의 스케일, 마인드셋, 업의 본질 파악, 사람을 보는 관점을 접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내가 어려서부터 기업가들의 인터뷰를 엄청 찾아 읽어왔는데, 인터뷰를 보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인터뷰에는 미쳐 담지 못하는 디테일한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으니 훨씬 더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세계를 알게 된 이상 저 이야기들을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커졌고, 직접 가보기 전에는 스스로의 한계를 알 수 없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는 물론 비범한 천재류도 있지만, 열심히 잘해서 큰 성과를 이루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는걸 알기 때문에 나도 잘하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5. 어려웠던 자산 시장

2022년은 자산 시장이 역대급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다. 다들 비슷하게 느끼셨을 것 같은데, 올해 초만 하더라도 시장이 이렇게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경고해주는 시그널도 많았고 시장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나머지 이러한 상황까지 미쳐 그리지를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모두가 안다. 작년까지 이어져온 흐름이 당연하지 않았던 흐름이었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통해 최대한 냉정하게 현상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한다는걸 다시한번 상기하였다. 또한 시장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레버리지는 최대한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도 상기하였다 (나는 레버리지로 손해본 것은 없었으나, 주변에 레버리지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던 한 해였다). 그리고 루나 사태를 직격으로 맞이하면서 가능성이 낮아보이더라도 발생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리스크로 확실히 인지해야한다는 것과 세상에 당연한건 없다는 깨달음 또한 얻었다 (당시에 적은 루나 회고록).

이런 시장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의 계좌 상태 또한 안녕하지 못하다. 특히 나는 기술주 + 크립토에 대부분의 자산이 투자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장 지수 대비 더 안좋은 성과가 나버렸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섹터들에 투자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긴 하나, 한가지 확실하게 배운건 주식을 싸게 산다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확실히 배웠다. 또한 능력의 범위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고찰하게 되었는데, 주식 가격들이 많이 빠지다보니 몇몇 종목에 대해서 내가 이 회사를 진짜로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솔직히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오픈도어(Opendoor)를 집 구매/판매를 압도적인 사용자경험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우세한 비즈니스라고 판단하여 주식을 들고 있었는데, 업의 본질은 회사 측에서 집을 잘 사서 잘 파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시장 환경이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걸 늦게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너무 테크 만능주의에 빠져서 비즈니스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변수들을 무시하고 있었다는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배움은 벤처투자업을 함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러한 시기에 펀드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면서 특히 많은걸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얼마나 귀한건지 느꼈고, 돈을 다루는 업이니만큼 신중하게 행동해야한다는 것도 깨달았고, 밸류에이션이라고 하는 것은 시장 상황에 따라 얼마나 크게 요동칠 수 있는지 경험했다. 동시에 벤처캐피탈리스트로서 우리의 돈이 어떤 의미인지(성공한 선배들의 자산을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 re-allocate 해주는, 부의 재분배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잘되면 서로에게 윈윈이다),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개별 투자건 만큼이나 전체적인 펀드 운용이 얼마나 중요한건지, VC 안에서도 경쟁 우위를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지 등을 생각해보는 한 해였다. 또한 장기적으로 금융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나의 길이 될 수 있다는걸 인지하기 시작했으며, Berkshire Hathaway, Capital Group, Tiger Management, KKR, Blackstone, 미래에셋 등 큰 업적을 남긴 금융 회사들을 조사해보면서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한 힌트를 얻음과 더불어 내가 어떤식으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6. 내년: 큰 기회가 다가온다

얼마전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내년에 매우 큰 기회가 올 수 있겠다는 강한 느낌이 찾아왔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면 내년은 올해 만큼이나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금리가 어느정도 높아진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이며, 이에 따라 VC업 또한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자신하는 이유는 올해 이 업을 해보니 업계 상위권에 올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음은 물론이고, 아직까지 비어있는 세그먼트들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잘 공략하면 1등 자리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약간 Next Big Thing을 잡는 Benchmark Capital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가 따라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대 Generative AI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좋은 프로덕트를 잘 알아보는걸 매우 잘하기도 하고, 우리는 이미 이 영역을 선도하고 있는 뤼튼테크놀로지스에 투자하기도 했다). 또한 해치랩스의 face wallet은 내년에 본격적으로 대중화될 web3 게임이 나오는 시점과 맞물려서 씬을 주도하지 않을까 싶고, 같은 흐름에서 크립토 씬에 다시한번 큰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거대한 변화가 동시에 두개나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뭔가 내가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 2023년을 준비 중이다.

또한 내년은 우리가 투자한 포트폴리오들이 주목받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잔디소프트의 매드월드는 내년 상반기에 게임 런칭이 예정되어 있고, 닥터나우오르조는 각 섹터를 선도함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Generative AI를 접목할 부분들이 보이고, 또한 웹툰을 쉽게 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text to toon 기술을 가진 툰스퀘어야 말로 Generative AI를 이용해서 큰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도록 옆에서 열심히 도와야지.

지금까지는 어떤 VC가 잘하는지 쉽게 알아보기 어려웠던 시대였지만, 이제는 수영장에 물이 빠졌고 진짜 실력있는 VC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펼쳐졌다고 보고 있다. 솔직히 나는 그 무대에서 잘한다는 소리 들어서 스포트라이트 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꼭 해내고 싶다.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 대놓고 적었으니 꼭 이뤄야겠지…? ㅎㅎ

 

7. 올해의 콘텐츠와 경험

위에서 마무리하면 멋질 것 같은데, 매년마다 인상깊었던 콘텐츠와 경험을 공유하는 섹션이 있었기에 올해도 공유해보려고 한다.

우선은 책. 올해는 총 34권의 책을 읽었다. 역시나 취향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올해도 대부분 경영과 투자 관련한 책들인데 올해는 특히 투자 관련한 책들을 더 많이 읽었다. 우선 올해는 허문명 저자의 ‘경제사상가 이건희‘와 ‘이건희 반도체 전쟁‘ 세트와 이건희 회장이 직접 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에세이, 이렇게 총 3권의 이건희 관련 책을 가장 인상깊게 읽었다. 삼성이 지금까지 이룬 성과는 사실 말이 안되는 일이라는걸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고, 이는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과 리더십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말 위 세 권의 책에서 이건희 회장의 세상을 읽어내는 능력을 보면서 감탄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투자 관련 책들 중에서는 ‘1조원의 승부사들’,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줄리언 로버트슨’, ‘투자의 모험’, ‘더 레슨’, ‘주식하는 마음’, ‘거인의 어깨’ 들로부터 여러 힌트들을 얻을 수 있었다. 투자를 더 잘하기 위함이라면 ‘더 레슨’이 유용할 것 같고, 전반적으로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책은 ‘투자의 모험’인 것 같다.

이외에도 ‘사랑의 기술’, ‘전길남, 연결의 탄생’, ‘공부의 위로’, ‘유난한 도전’ 정도를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사랑의 기술’은 내가 평소에 전혀 읽지 않는 주제와 타입의 책인데, 생각 이상으로 책 속에 담겨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뷰가 날카로워서 인간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연결의 탄생’은 블록체인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집어들었는데 역시나 인터넷 시대와 블록체인이 겹치는게 많이 보여서 같은 흐름의 반복일 수 있겠구나 다시끔 떠올리게 해주었고, ‘공부의 위로’는 제목과 저자 커리어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집어들었는데 공부 잘하는 사람(서울대 모범생)의 뷰를 간접 체험한 느낌이라서 좋았고, ‘유난한 도전’은 일단 재미있을뿐더러 모르던 디테일들의 추가와 더불어 토스 구성원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유익했다.

올해의 콘텐츠는 샘 알트먼의 아티클들을 뽑고 싶다. 그의 글들은 항상 영감을 주곤 하는데, 특히 How to be successfulHow To Invest In Startups 두 글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의 글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고, 뒤의 글은 투자자들과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해당). 그리고 그의 트위터에 올라오는 짧은 글들도 통찰이 담겨있을 때가 많고 (대표적으로 이거), 그가 출연한 영상에서도 미래에 대한 힌트를 접해볼 수 있다. 샘 알트먼은 나보고 지금 인류에서 단 한명만 주목하라면 그를 고를 정도의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앞선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중에 한명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샘 알트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을 정도다.

경험 중에서는 지스타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게임 산업의 규모가 크다는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스타를 기점으로 온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이 산업을 나의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게임좀 하고 살껄…) 또한 코리안블록체인위크(KBW) 행사도 인상깊은 경험이었는데, 행사를 잘 활용하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걸 인지하기도 했고 ‘네트워킹’이란걸 처음 해보는 자리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올해는 문화 콘텐츠를 예전에 비해 많이 즐겼다 (VC를 시작해보니 일과 삶의 분리가 잘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아 일부러 혼자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문화 생활 빈도를 늘렸다). 거의 매달에 한번 클래식 공연을 찾았던 것 같은데, 대부분 오케스트라 교향곡을 들었지만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건 ‘루돌프 부흐빈더의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터치 하나하나가 묵직한 깃털 같은 느낌이랄까? 약간 영적인 느낌이 드는 공연이여서 기억에 남는다. 특히 슈베르트가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찾아보니 최근 부흐빈더의 앨범이 발매되었다니 궁금하면 한번 들어보시라.

미술관도 자주 찾아갔는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무려 3시간을 기다린 끝에 들어간 ‘이건희 컬렉션‘이 기다린 보람이 차고 넘치다고 생각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마침 그때 이건희에 꽂혀있기도 했어서 더더욱 감동받았던 것 같다 (그림 만큼이나 이건희 회장의 콜렉팅 스킬에 감탄했다). 최근에 S2A 갤러리에서 본 김환기의 ‘우주’ 또한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우주를 본 이후부터 다른 김환기 작품이 눈에 잘 안들어온다).

올해 영화는 정말 몇편 안보았는데(합쳐서 5개도 안되는듯?) 그래도 아이맥스로 본 ‘‘은 이상하게도 티모시 샬라메 역할에 내가 대입되면서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았고, 예전부터 기대하던 ‘해어질 결심‘은 기대를 뛰어넘는 작품이였다고 생각한다.

올해의 미식으로는 정말 자주 찾아갔지만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한성칼국수’를 뽑고 싶으며, 맛의 측면에서는 ‘스시 마츠모토’에서 맛본 스시들이 가장 감칠맛나는 음식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미식은 가면 갈수록 맛 보다는 전체적인 경험과 누구랑 함께 갔느냐가 훨씬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미각이 발달한 것 같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올해의 장소는 지스타 시기에 숙박했던 아난티 코브의 테라스 풀하우스. 사실 올해 여기 말고는 특별하게 방문한 곳이 없긴 한데, 그래도 아난티 코브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내년을 다짐하는 오브제가 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내년에는 새로운 영감을 찾으러 다시 이곳저곳 돌아다녀보도록 해야겠다.

 

예상했던대로 적다보니 가장 긴 회고록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고, 시간도 그만큼 빠르게 흘러간 2022년이었던 것 같다. 나의 회고록의 양과 질이 매년 높아져가는 것 같은데, 내년에도 이 흐름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잘해봐야겠다. 모두들 올해도 감사했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